현재 내가 사는 동네의 한 상가를 둘러보면 이렇다. 분식집, 미용실, 네일숍, 애견숍, 수선집, 문구점, 치킨집, 세탁소, 편의점. 이 중 치킨집, 세탁소, 편의점을 빼면 모두 여성 상인이 '사장님'이다. 동네의 다른 상가도 비슷한데, 작은 점포를 운영하는 상인들은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대부분 상행위는 점포를 통해 이뤄지지만(인터넷 거래가 대세이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보따리를 이고 지고 가가호호 방문해 상품을 판매하는 여성 상인들이 많았다. 어릴 적 내 기억에 선명한 방문 판매 여성 상인은 '신앙촌 아줌마'라 불리던 옷 장사 아주머니와 '쥬단학 아줌마'라 불리던 화장품 판매 아주머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방문했는데(아마도 외상 수금일에 오셨던 것 같다), 이분들이 오시면 가내 쇼핑으로 한바탕 신바람이 일었다.
'신앙촌 아줌마'의 큰 보따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옷들은 다양했다. 속옷부터 각종 옷들이 가득했는데, 새 옷을 실컷 구경하고 입어보기도 하며 소란을 떨었다.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태산만 한 옷 보따리를 어떻게 이고 다녔을까 싶다.
그 아주머니는 남편과 일찍이 사별하고 아들 하나를 열심히 키웠는데, 당시 아들이 좋은 대학을 갔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꼭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외식이 흔치 않던 때이기도 했지만, 점심값을 아끼려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종종 우리 집 점심 먹을 때 오시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집밥을 드려도 꼭 본인 도시락을 꺼내 드시곤 했다. 근검하고 성실했던 여성 가장이자 '여사장'이었다. 이들도 점포만 없다 뿐이지 어엿한 자영업자 '여사장'이었는데, '보따리장수'로 불린 건 너무했다.
김미선의 책 <여사장의 탄생>(2025년 3월 출간)을 보다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던 여성 상인들이 생각났다. 위에서 말한 방문 판매 '여사장'들은 물론이고, 초중고를 다닐 때 학교 근처 문방구 등 상점을 운영했던 상인들도 거의 여자분들이었다.
여성 자영업자는 1950년대 '6.25'전후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여성들이 뛰어들었기에, 저자는 이를 '한국전쟁이 낳은 여사장'이라 정의했다. 이 말은 이들이 원해서 장사를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생계가 막막한 이들을 흡수할 노동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고, 방 딸린 점포에서 자녀 양육과 가사를 병행할 수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진입했다는 의미이다.
여성에게 일자리가 없었고 가사와 일을 분리할 수 없었던 사회 구조적 문제가 야기한 결과지만, 이렇게라도 살길을 찾는 '여사장'들에게 사회는 '여성답지 않다'며 배제와 차별로 대했다. 여성 혐오적 차별 속에서도, 1980년대 급속한 산업화로 여성들이 임금노동자로 대거 포섭되기 전까지, 여성의 자영업이 임금노동보다 더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뿐인가. 엄마와 시장에 갈라치면 시장에서 만나는 상인은 거의 대부분 '여사장'이었다. 야채, 고기, 생선, 건어물, 젓갈 하다못해 순댓국집까지 여성 상인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여성 상인들이 가족의 생계와 부의 증식을 위해, 더 나아가 나라 살림 증대까지 일구느라 살림과 장사를 병행하며 고생했을까. 저자의 주장처럼, "자영업은 여성의 경제적 행위이자 활동이며 실천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영업 여성들의 노동의 가치와 가정과 텀블러인쇄 나라 경제에 미친 기여에 지나치게 박한 평가를 해왔다.
한국경제사학자 이종현은 자영업이 "한국 경제의 성장사 전반에서 실패의 비용을 흡수한 거대한 저수지의 역할"과 "잉여 노동력을 흡수해 실업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으며 "국가 주도의 시기에 제도권 밖에 방치된 시장에서 이들은 국가 경제의 모세혈관 기능"을 해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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